박래현 작 ‘단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최근 천안시립미술관의 협력 전시 준비로 천안을 오고가며 또 다른 도시 분위기의 작가들과 작품을 관찰할 수 있었다. 특히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에 현재 ‘운보 김기창’ 전시를 관람하며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작품은 한국 근대 화단의 대가, 김기창(1914~2001)의 작품들 보다 전시장 한 켠에 마련 된 김기창의 부인이자 동시대 여성작가 우향 박래현 작가의 작업들이었다. 한국화의 근현대적 전환기점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관통한 두 작가의 시선이 나란히 배치 된 전시장의 구성은 대인의 회화적 여정을 넘어서 당시 미술사의 다양한 확장성과 실험성을 보여주는 장치이자 해석으로 읽힌다.
김기창이 전통을 기반으로 한 동양화의 추상적 가능성을 밀도 있게 탐구했다면, 박래현은 서구적 조형 각감과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 서사성을 화면 안에 구성하여 그 경계를 부드럽게 연결하였다. 두 사람은 살아생전 각자의 개인전을 여는 대신 부부 전시회를 개최하여 창작과 전시, 작품을 공유한 예술적 동반자이기도 했다. 전시장 공간에는 서로의 작업을 지켜보며 응원하고 창작에 대해 자극 받았던 둘의 관계이자 조화를 동시에 엿볼 수 있었다.
우향 박래현(雨鄕 朴崍賢, 1920~1976)은 동양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했던 선구적인 작가이다. 청각장애인이자 자신보다 더 화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고, 식민지 화가로, 청각 장애 화가 남편 운보 김기창을 뒷바라지하고 네 아이를 키우면서 틈날 때마다 붓을 들던 그야말로 현대여성이었다.
그러나 화가로서 명성을 얻고 여성들의 선망이 될수록 사람들은 그를 ‘김기창의 아내’, ‘김기창과 같은 길을 가는 부인’이라 갇둘 뿐이었다. 당시 견고하고 여성작가들의 활동이 열악했던 한국화단의 장벽을 박 작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시도하며 포기하지 않았다. 김기창의 아내로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의 가능성을 ‘박래현’ 이름 석 자를 걸고 끊임없이 정진한 결과임이 틀림없다.
누구의 아내란 그늘에 가리어 당대 화단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던 박래현. “가사의 굴레와 남편 김기창의 그늘에 갇히지 않고, 생활 속에서 예술의 주제, 재료, 기법을 찾아내며 새로운 동양화를 탐구한 작가”라고 현재 근대미술계의 평가를 받고 있다.
김기창 작 ‘군마도’. 운보문화재단 제공
작가는 평안남도의 부유한 집안 장녀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했는데, 본래는 의사가 되고 싶었으나 큰 주삿바늘이 무서워 꿈을 접었다고 한다. 1920년 일제식민 치하에서 미술을 시작하여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사범대학) 재학시설 일본 미술교사 에구치 게이시로에게 그림을 배웠다.
1940년 도쿄여성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선택했다. 세계를 여행하고 이국 문화를 경험하며 독자적인 추상화의 영역을 개척했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데 반백살이 다 된 나이에 홀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사회적 분위기는 또래 여류 화가들이 원하던 화업 일을 접고 꾸던 꿈도 포기하는 나이에 그는 안주하지 않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놀랍고도 당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동양적 채색 뿐 만 아니라, 판화와 태피스트리의 새로운 기술을 익힌 작가는 판화와 동양화의 결합이라는 전인미답의 작업에 착수한다. 시대적으로 박래현은 작가로 온전히 예술 작업에만 집중할 수 없는 현실과 그런 자신을 진정한 예술가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고민과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내와 엄마, 며느리의 여러 주체적 삶의 고된 와중에도 화가 박래현은 굴하지 않고 누구보다도 전위적인 행보와 실험적 시도를 지속적으로 내보이던 근현대미술가의 선구자이자 모험가였음을 오늘 우리는 해석할 수 있다.
그의 화단 데뷔작 1943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수상한 ‘단장‘은 붉은색 화장대와 마주하고 있는 검은색 기모노 차림의 일본소려를 단순하지만 강렬한 색채 대비로 표현한 작품으로 관습적인 일본화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확장하고 감각적인 구성미가 시작되고 있음을 짐작 할 수 있는 대표 작품이다.
박래현 작 ‘이른 아침’.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해방 후에는 서구의 모더니즘을 수용한 새로운 동양화풍으로 1956년 대한미협과 국전에서 ‘이른 아침’, ‘노점’으로 대통령상을 연이어 수상하며 화단의 중진작가로 자리 잡게 된다. 일본에서 배운 일본화를 버리고, 한국 전통수묵과 담채로 당대의 미의식을 재구성하며 박래현만의 독자적인 ‘현대 한국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거둔 결실이었다.
1950년대 중반까지 작품의 소재는 여인들이었지만, 피난 시절을 거치면서 작품 속 여인들은 점점 가난하고 평범한 모습을 띄고 있는 변화를 짐작 할 수 있다. 작가노트에 “형태와 색채의 융합을 생각하게 되고 색의 변화가 이룩하는 고유한 형태의 화면 통일에 신경을 쓰게 되며 때로 특유한 선이 암시하는 입체성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적기도 하였다.
박래현 작 ‘불안’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 아침 6시쯤 일어나 기저귀 빨기, 밥 짓기, 청소하기, 아침 식사가 끝나면 이것저것 치우고, 닭의 치다꺼리, 아기 보기, 정오면 점심 먹고, 손이 오면 몇 시간 허비하고, 저녁 먹고 곤해서 좀 쉬는 동안에 잠이 들면 자 그러면 본업인 그림은 언제나 그리나. ” (1948년, 박래현의 수필 ‘결혼과 생활’ 중에서 발췌)
작가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여성 예술가로서의 사회적 역할과 작가로서의 예술 세계를 절충하고 균형을 맞추는 데 일생을 쏟은 작가였다. 혹 학교 선후배이자 같은 시대 활동했던 천경자와 비교되곤 하는데, 천경자는 여성을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했다면 박래현은 생활인으로서의 여성의 모습을 더 강조했다. 작가는 자기 삶을 낭만화하거나 현실을 외면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여성임에도 생활인으로서의 의식이 강해 자신이 여성이란 것에 대해 깊이 자각하며 이를 화폭에 옮기는 작업을 했다.
지금의 사회적 시각으로도 도전적이었던 박래현의 행보를 살펴보면 놀라운 면들이 드러나는데 미국에서 판화를 배우고 귀국한 뒤 판화와 동양화를 결합한 새로운 방향을 선언하며 야심차게 신작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한국적이고 현대적인 회화를 모색하며 동양화의 재료와 기법을 넘어 세계 화단과 교감 하고자했던 추상화, 태피스트리, 판화까지 폭넓은 재료 탐구와 자취는 가부장제 시대의 한국미술사에 선구적인 행보로 지금까지도 많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전해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