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20200616_광주매일신문_故이강하, 5월 시민군이 지켜 낸 남도의 땅과 생명의 빛
작성일자 2020-06-17




[광주매일신문]

<5·18 민주화운동 40주년기념 큐레이터 장경화 '오월의 미학'>(8)



故이강하

- 5월 시민군이 지켜 낸 南道의 땅과 생명의 빛 -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캔버스에 오일아크릴, 1270×200)


  2008년 3월4일, 이강하는 자택에서 5년간의 투병생활을 접고 가족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토록 치열했던 예술을 뒤로하고 54세의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그는 마지막까지“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병마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물감을 짜고 붓을 쥘 수 있는 힘이 없어져 간다는 것이야”라는 말을 반복하며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병마를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80년대 우리사회는 정치, 문화적으로 변혁의 시간이었다. 특히 미술에서는 무분별하게 수입되는 서구형식 미술 반성과 함께 한국미술의 정체성과 자생력 확보를 위한 논쟁과 운동은 확산됐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래가지 못하고 자본을 앞세운 미술시장과 무분별한 문화사대주의 정서는 서구미술과 손을 잡았다. 이강하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외로운 투혼의 예술을 펼쳤다. 결국 건강을 지키고 못하고 남도하늘의 별이 돼 오늘도 빛을 발하고 있다.





▶5월 시민군의 지명수배
   이강하는 1953년 영암에서 평범한 가정의 3남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어린 시절부터 부친의 단청 그림과 상여 장식물 제작을 지켜보면서 전통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췄다. 특히 그가 초등학교 시절, 당시 스케치여행 중이었던 조선대 미술과 대학생 강연균(2학년)과 고(故) 최연섭(1학년)을 만나 이들의 그림으로 충격적인 감화를 받았고, 강연균 화백과의 각별한 인연이 시작됐다.

  조선대 미술학과 입학 이후 1980년 5월, 당시 이강하는 학교 교정에서 여학생을 구타하는 공수부대원을 목격하고 격분한 나머지 잠시 붓을 놓고 고향인 영암에서 시민군 모집을 위한 선전용 플래카드 제작과 시민군을 조직한다. 이처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응징해야하는 그의 강직한 성품은 삶 곳곳에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역시 남다른 역사인식과 시대정신은 강직하고 올곧은 성품에서 출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를 강연균 화백은 회고한다. “1982년경 이강하와 함께 부산스케치 여행 중 여관주인이 광주에서 온 수상한 사람들이 있으니 검문을 해달라고 신고해, 경찰의 불신검문으로 이강하는 부산경찰서로 연행이 됐습니다. 다음날 보증을 서고 광주로 함께 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때 이강하는 5·18관련 재판이 모두 마무리 됐는데… 경찰의 전산망에 기소중지자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강하는 1980년 지명수배자로 쫓기다가 자수와 함께 재판으로 1년여 간의 옥고를 치루게 된다.

  이후 본격적으로 강연균 화백을 통해 회화에 대한 조형기초와 더불어 예술가로의 역사를 읽어가는 눈과 시대정신의 무장과 이해를 넓혀나갔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그는 남도산하와 역사에 대한 애정있는 시각으로 그만의 독창적인 예술을 확보했다. 오랜 시간 이강하와 강연균 화백은 ‘광주’와 ‘예술’이라는 울타리 아래 사제 관계만이 아니라 돈독한 동지애적인 관계를 마지막 시간까지 함께했다.   

▶한국미학의 정체성과 자생력 탐구
  1970년대 후반, 우리화단은 이념적 측면에서 보자면 크게 두 가지의 경향으로 양분화 돼 있었다. 하나는 서구 형식미학 예술사조인 모더니즘과 미니멀리즘의 경향들이 무분별하게 수입돼 유행됐다. 다른 하나는 민중미술의 경향이다. 79년부터 서서히 싹을 키우던 민중미술은 1980년 5월을 기점으로 광주와 서울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확산됐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미술계뿐 아니라 사회·정치, 문화계의 전반에 거쳐 일제잔재 청산문제가 수면위로 급부상됐다. 미술계에서도 예외 없이 친일파에 대한 문제가 부각되면서 한국미술의 정체성과 함께 자생적인 담론형성은 젊은 미술이론가와 진보적 미술인들의 실천적 작업과 성과물들로 뜨거웠던 시기였다.

  70년대까지 아카데믹한 그림에 충실했던 그는 79년부터 예술관에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부친에게 유산으로 물려받은 전통의 미의식이 폭넓게 자리하고 있던 연장선에서 80년대 한국미술 정체성과 자생력에 대한 담론은 그의 예술관을 확고하게 만들었던 전환점이 됐다고 본다. 이후 한국미술 원류와 전통미학의 재해석에 대한 연구를 위한 대학원졸업논문으로 ‘단청의 회화사적 고찰’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로 받아들여진다.

  80년대 후반이후 90년대에 들어 그는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더욱 심화시켜 그 범위를 확대시켜 나간다. 그가 태어나서 살고 있는 남도의 전통미학 분석과 재해석으로 자신의 ‘장인미학’ 어법을 고착화시키기 위한 의지를 확고하게 드러낸다. 그는 이렇게 한국미술의 본질을 시각화하는 것에 있어 현대적이고 보편적 양식을 담보해야 하는 문제를 항상 숙제로 두고 고민했다. 특히 이론적으로도 철저한 논리를 갖추지 못하고 철학이 없는 형식만을 유희하는 미술을 비판하며, 단순한 소재주의나 색채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함을 경계해 왔다. 그리고 자신의 정서적이고 역사적 지각에 대한 전통가치 이해와 미의식의 감흥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표피적 복제에 머무를 수 있다는 함정을 인지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대학원에서 ‘단청’에 대한 졸업논문을 통해 한국미술의 근본을 찾고자 학술적 탐구를 했던 것이다. 동시에 부친을 통해 축척해왔던 회화의 전통적 방법과 오방색, 미의식의 올바른 전승에 대한 노력을 병행했다.

  이강하는 그림을 그리다가 이러한 문제들에 봉착할 때마다 수시로 남도지역 답사와 전통에 대한 이해와 감흥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위해 국외여행을 했다. 넓은 세계관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문화와 역사는 시대별로 주변 국가들과 함께 연관돼 발전해 왔으며, 외국에서 바라볼 때 우리의 가치를 폭넓게 객관적 위치에서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미술의 정체성, 자생력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글로벌 보편성이다. 그는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서양화라는 예술양식을 독창적 제작기법과 소재와 표현대상에 대한 이미지 재구성, 그리고 미학적 어법은 중요한 숙제였다. 이렇듯 그는 예술에 관한 문제를 한국미술의 여러 가지 담론들에 휘말림이 없이 독자적으로 충실하게 실천해 가고 있었다. 특히 90년대에 들어 대작중심으로 야심차게 진행된 서울 외 전국 7개 도시 순회전은 미술계에 큰 주목을 받게 됐다. 이시기 변변하게 후원하는 컬렉터, 큐레이터, 화랑, 미술관 등이 없는 상황에 진지하고 묵직한 성과물을 내놓은 작가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본다.  



‘아-1994년’ (캔버스에 아크릴·162.1×130.1, 1994)


▶장인정신과 리얼리티의 완성도
  “나의 작품세계 그것은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모내기 하는 감사한 마음으로… 신이 나에게 쥐어준 능력과 사고를 다하여 진통하고 고통하며 산출해 내는 작업이고 싶다.” 그의 작업노트를 통해 장인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장인의 도(道)와 정신으로 우직하고 잔재주를 부리지 못하는 성품은 예술가로서도의 거침없이 이어져갔다. 한국미술계에 그처럼 치열한 장인정신으로 기능적 완성도가 높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업태도는 캔버스에 달라붙어 꼼꼼한 세필로 무수히 많은 반복적 덧칠하는 과정을 통해 일궈 놓은 성과물들은 놀랄 만큼 경이롭다.

  이처럼 캔버스 화면은 세필의 덧칠과정을 통해 사실적이고 세밀하면서 고른 화면 톤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작품에 등장하는 누드를 보면 실제 여인의 피부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의 감동과 산이나 나무, 잡초, 천 등의 질감은 긴장감을 주고 있다. 그만의 독창적인 장인적 예술양식으로 고착화 된 것이다. 이러한 작업의 성향은 생전 그의 작업실의 담배 재떨이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타고난 천성으로 1979년 ‘맥’연작 이후부터 모든 작품 하나하나에 진지함과 성실한 손때가 묻어나오고 있다. 이렇게 이강하의 작업방식은 많은 시간과 열정을 소모시켜 다작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열정과 투혼은 다작의 어려운 과제를 극복하고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이러한 미학어법은 장인적 기질을 바탕으로 열정적인 예술혼을 담아내는 완성도 높은 리얼리티의 모범적 사례는 오늘까지 시공을 넘어 감동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맥(脈) 연작
   맥 연작 제작은 한국미술의 정체성에 관심을 두고 탐구를 시작한 79년부터다. 불교와 샤머니즘 등에 관심을 갖고 전통적 민족정서와 가치, 역사와 사상에 대한 근본을 찾고자 하는 집중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이 시기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발’이다. ‘발’은 오랜 역사 속에 더운 여름 일상에 흔히 사용되고 있는 생활용품으로‘발’에 드리워진 이미지는 ‘신비스러운 시각효과’ 즉 ‘감춤의 미’가 있다. 이시기 그의 작품은 ‘발’을 성공적인 평가를 얻기에 충분했다. ‘발’뒤의 불상, 사천왕, 탈, 등은 전통적 종교의 상징이자 우상이다. 이러한 상징적 이미지를 꼼꼼하고 섬세하게 담아 한국미술의 원류이자 뿌리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불교적 정서와 전통적 삶의 방식의 이해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러한 연장선의 ‘맥’의 연작을 통해 민족의 정신을 세우려는 한국미술의 정체성과 자생력 탐구의 성과다.




‘영산강과 어머니’ (캔버스에 오일·259.1×193.9, 1987)


▶영산강의 사계와 무등산 연작
  80년대 중반이후 90년대 초·중반까지 영산강과 그 주변을 중심으로 사계를 담아내는 작품을 제작한다. 영산강은 그가 성장하면서 느껴왔던 삶의 현장이자 역사의 주체로 치열하게 살아온 남도인의 터다. 즉 그 영산강에서 남도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던가를 장구한 역사 속에 흔들림 없이 강건하고 의연한 삶을 서정적으로 담아내었다.


  그의 작품 ‘영산강과 어머니’는 질곡의 역사를 넘어 다시 의연하게 흐르는 영산강과 강건한 우리의 어머니이자 남도인(南道人)이다. 그리고 그 주변의 잡풀들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꺾이지 않고 새싹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강물과 강둑의 비단길은 흐르고 흘러 오대양을 넘고 무등산과 휴전선을 넘어 한라에서 백두로 이어지는 민족통일의 염원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잡초와 비단길이 불에 탄 흔적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강둑에 길게 드리워진 불에 탄 흔적은 남도의 아픔을 담은 질곡의 자취일 것이다.

  그리고 ‘무등산 연작’은 ‘영산강 연작’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비단길은 무등의 정신과 꿈꾸는 이상향으로 누드여성은‘인간과 자연의 합일치’와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문화와 가치에 대한 자유로움과 순수성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오방색 비단길은 무등에서 백두까지 이어지는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광주 5월 시민군인 ‘이강하 정신’이자 ‘광주정신’이다. 비단길의 단청문양에서는 전통과 현대를 관통하고 이어지는 민족의 정서이자 상징이자 정체성이다. 이렇듯 그의 무등산 연작은 이중적 내지는 다중적인 상징성과 은유성을 함축하고 있어 보인다. 영산강은 남도인의 삶에 대한 깊은 애정과 그리움으로 역사와 시대에 대한 인식이 서정성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그리고 ‘무등산’은 관념적 이미지의 상징으로 꿈과 희망을 품고 다가올 미래를 예감하듯 따뜻한 기운을 품은 이상향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무등산’ 연작은 초현실적인 분위기도 드러난다.

  정의롭고 뚝심 있는 5월 시민군 이강하…. 큰 소리로 통쾌하게 웃으면서 소년처럼 즐거워하던 순박한 화가 이강하…. 그는 열정적인 삶과 투혼의 예술로 이제 영산강과 무등산을 지키는 남도 하늘의 별이 됐다. 붓끝이 익어있는 이강하의 54세 생애는 아쉽지만 그가 일구어 놓은 광주시 남구 ‘이강하미술관’(양림동)은 우리와 함께 호흡할 것이다. 오늘도 남도의 하늘을 밝히고 있는 이강하의 별을 본다.




이강하미술관 전경. (광주 남구 3·1만세운동길 6)



▶약력(영암생, 1953-2008), ▶조선대학교 미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개인·초대전 15회(광주, 서울, 영암) - 1995 전국 7개 도시 순회전 (서울, 광주, 인천, 부산, 대구, 대전, 제주) - 2009 1주기 추모전-열정의 삶과 투혼의 예술(광주, 광주시립미술관) - 2018 이강하의 길(광주, 이강하미술관)단체전 - 2006 오늘의 현장전(광주시립미술관) - 2005 조용한 빛, 맑은 기운(중국, 광저우시립미술관) 한국현대미술초대전(서울, 문화갤러리) - 1997 21C 한국미술의 표상(서울, 예술의 전당)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 장경화(전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기사 URL : http://www.kjdaily.com/read.php3?aid=1592299506514235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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