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예향]

이강하 회화와 신용구 퍼포먼스 협업

기억의 현대적 변용…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비단길

이강하미술관5·18 41주년 기념, ‘비단길-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강하미술관 1층 전시실 바닥에 오방색 비단길이 펼쳐졌다. 생명을 키운 태반과 탯줄의 형상으로부터 시작된 비단길은 인생의 등고선을 그리듯 굴곡을 보이며 간단없이 이어진다. 주 재료인 한지는 일회적 혹은 연질의 속성을 버리고 비단의 색깔을 입은 강한 소재로 변모했다. 한지 비단길은 전시장 안 평면의 회화와 조응하면서 다차원 공간예술을 창조해 간다. 비단의 성질을 나눠 받은 한지는 때론 짧고 때론 긴 호흡으로 고락의 인생길을 안내한다. 오방색 한지로 재현한 비단길 <광주, 꿈의 조각들을 모으다> 설치 작품은 삶과 죽음, 고난과 역경을 헤 치고 나아가는 인간의 삶을 담고 있다.

1990년대 비단길을 그렸던 이강하는 “길은 모든 것을 수용하며 거부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 그의 비단길은 시공을 아우른 큰 개념으로 확장됐다. 한지 비단길 좌우로 이강하의 1995년 작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회화 작품과 이에 대한 오마주로 신용구의 퍼포먼스 영상이 공명하는 현장이다. 길과 평면의 벽이 만나는 지점에서 뿌려지는 이 영상은 지난해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무등산에서 행해졌던 퍼포먼스다. 이 행위예술이 이번에 미술 관으로 이어져 시공간을 매개하는 장치로 활용 되었다.

‘비단길-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전시의 부제가 무게 있게 다가온다. 이강하의 예술적·정신적 토대가 된 5·18민주화운동 이후 다양하게 변모한 동시대 작가의 관점에서 5·18 을 재해석하고 시공간 소통의 경험을 반영한 때문이다. 무형의 전통과 의식, 남도의 정한과 애환 등의 비물질적인 감정들이 형상화·시각화되었다. 세대를 넘어 두 작가를 관통한 공감 과 공통성이 작품으로 이어져 합체되고 있다. 자유와 평화, 치유, 화해와 같은 비물질적이고 비가시적인 열망과 염원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존재하지 않는 물질’의 본질이 드러나는 역설적인 순간이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 출품되었던 이강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는 장구한 남도 의 역사와 애환을 주제로 한 거대 서사였다. 200x1270cm에 이르는 대형 회화에서는 자 유와 평화의 이상향을 향한 예술가의 에너지 가 강처럼 넘실거렸다. 무등산 산천을 배경으로 대지와 호흡하는 각기 다른 포즈의 12명 누드는 민주주의와 통일을 지향하는 순수성의 상징이다. “무등의 산등성이마다 자유의 들꽃이 만발하게 꽃피고, 정의의 강물이 도도하게 흐른다”라고 한 작가의 말처럼 화폭 속 디테일 한 요소들은 역사인식과 시대정신을 강직하고 올곧게 표출하는 기표로 작동했다. 화면 중앙에서부터 뻗어 나오는 비단길은 역동감을 극대화시키고 원근법이 비현실적으로 강화되어 긴장감이 배가되는 효과를 보여 준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화면 구성이지만 내포된 의미가 사회와 밀착하면서 작가만의 리얼리즘을 완성했다. 역동적인 화면 구성과 색감은 모든 만물이 조화를 이루는 음양오행의 동양적인 사상의 반영이다.

이강하의 주요 소재가 되었던 ‘발’은 현실과 내세의 차별성과 접점을 상징하는데 적합했다. 발은 공유 공간이 다르지 않음을 인식시켜 샤머니즘적 내세관에 접근한다. 화면 속에서 대칭을 이뤄 배치된 두 개의 ‘발’은 안과 밖, 현실과 내세, 이승과 저승의 동시성을 보여주며 공간을 공유함과 동시에 분할한다. 시간의 배제는 망자에 대한 극한의 그리움으로 수렴된다. ‘발’ 에 가려진 채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 탈춤 은 주검을 위한 산자의 살풀이이자 굿거리이다. 이러한 살풀이이자 굿거리는 맞은편에 설치 되어 이미지 퍼포먼스 작가 신용구의 6분 35초 비디오 작품 <광주, 꿈의 조각들을 모으다>에 서 현대적으로 재현되었다. 역사적 상흔이 새 겨진 도시들을 찾아 전시 및 퍼포먼스 작업을 진행해온 신용구는 현대적 주술과 영을 몸과 행위로 연결하면서 역사적 파편들을 부활시키고 있다.

<광주, 꿈의 조각들을 모으다> 영상은 이강하 화백이 생전에 영감을 받았던 무등산 기슭에서 40m 길이의 한지길 등 오브제를 제작해 설치 촬영한 것이다. 동시대 미술이 특정 장르를 넘 어 다원화되었듯 신용구의 작품은 설치, 퍼포먼스, 무용, 영상 등 다매체적 요소의 외연을 지니고 있다. 내연에는 주술적이고 샤머니즘적으로 접근한 순환되는 삶과 생명의 의미를 담아 낸다.

비디오 영상 안에는 무등산의 청아한 푸른빛 과 비단길 오방색이 조화를 이루면서 신용구의 농밀한 몸짓을 부각시키고 있다. 무등산에 깔아 놓은 한지 비단길을 내딛는 신용구의 섬세한 몸짓에서 애환과 상처가 감지된다. 무등산에 재현된 비단길을 맨발로 걸어가고, 나무 아래 묵상에 잠기기도 하는 그의 행위는 계산되어 있지 않지만 치밀하며, 절제되어 있지만 생명력과 원초성이 발산되고 있다. 상처받은 이들을 위무하고 치유하는 제례 의식은 예술 행위를 초월한 메타 예술 행위로 해석 가능 하다. 동시대 예술의 역할과 의미는 무엇인가. 시간의 퇴적 속에 풍화되어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예술은 어떠한 방법론과 실천론으로 끊임 없이 기억을 환기시키고 기록하며 재생할 수 있을까?

기억을 위한 반복되고 질긴 행위가 없으면 더 이상 미래로 나아갈 수 없듯이 동시대 모든 빚 진 자들에게 역사와 과거의 보존은 숙명일 것 이다. “기억은 과거를 보존하여 현재로 연장하면서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개방하는 지속 그 자체 다” 라고 앙리 베르그손이 말했듯, 우리는 마치 손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은 기억들을 연료 삼아 미래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기억들은 선한 미래를 만들기 위한 인류 공동체의 집 단적 의지이자 축적된 경험이라 할 수 있다. 41년 전 자유와 평화를 위한 열망이 다층적으로 침투되어 동시대 예술과 화학 작용하듯, 미래의 어느 순간 5·18민주화운동의 기억들은 또 다시 다층위적으로 변주되면서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건넬 것이다.

글 / 정금희 교수

사진 / 이강하미술관 제공